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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예정론(이중예정론)은 틀렸다. 바울의 주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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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대해 설명하려면 이런 게시글 한 개로는 부족하다.

또 글을 길게 쓰면 읽기도 어렵고 이해도 안된다. 

이 글에서는 성경전반에서 언급된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중예정론"이 틀린 이유를 설명하겠다.

이 글은 복잡한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글이다.

따라서 어려운 인용구는 최대한 쉽게 인용하고, 전문용어나 개념도 쉽게 풀어썼다.

전문 신학용어 안쓴다고 듣보잡이라고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이글에서 말하려는 예정론

예정론이 과연 무엇일까?

목사님 10명에게 물어보시고, 장로님 10명에게 물어보시고, 유튜브 10개 영상을 한번 보시라.

설명이 모두 다르다.

예정론이라는게 있다고는 하나, 실제로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예정론이 맞다 틀리다 말할 순 없지만,

이중예정론에 대해서는 분명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주장을 중심으로 <이중예정론>의 오류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참고 : 단어의 정의

혹시나 자기만의 단어의 정의를 가지고 이상하게 해석하실 분들이 있을것 같아 설명합니다.

"예정" 이란것은 "구원이 미리 결정되었다" 는것을 뜻하며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구원을 결정해 두셨다"는 것이고

예지예정론은 "그사람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미리 아신다. 그래서 구원여부를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구원여부를 아실 뿐, 결정은 사람이 한것이다. 하나님의 강요가 아니다 는 뜻이다.

 

 

예정론의 큰 줄기 두 가지

● 첫 번째 줄기 - 이중예정론

이중예정론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영생을 얻을 자와 영멸을 당할 자를 창세 전에 (단번에) 예정해 놓으셨으며,
이 예정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하다

 

칼빈파의 주장이며,  절대주권 개념에 의거해서

구원받을 자 / 지옥 갈 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명제가 뒤따르게 되는 주장이다.

 

필자는 첫 신앙생활을 장로교 통합교회에서 시작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것이 바로 위의 주장이다. ( 구원받은 자 정해져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또한 잠시 속해있었던 네비게이토, IVF에서도 동일한 명제를 교육을 받았다.

이 주장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라고 인정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자로 만드는 교리라고 본다.

 

 두번째 의견 - 그냥 예정론

같은 루터/장로교 교단 분들 중에서도, 이중예정론에 반대하는 분들도 꽤 보인다.

칼빈교리를 바탕으로 한 예정론이지만, 그렇다고 세번째 의견인 "예지예정론"과는 맥을 달리 하는 의견이다.

애매한 예정론이므로, 그분들의 생각을 그냥 <예정론>으로 부르겠다.

이분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 
또한 특정한 한 사람의 인생에도 (강제 개입이 아니라)
성령님의 개입, 환경의 개입 등
자연스럽게 개입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

 

하나님의 개입 / 예정이라는 개념은,  한 사람을 강권적으로 조종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이것을 무시하지 않고 사랑과 은혜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한 것조차도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주장이다.

 

 세번째 의견 - 예지예정론

웨슬리 교단의 주장인 <예지예정론>이다.

이상하게도 "칼빈교리"입장에서의 <예지예정론>을 설명한 글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예지예정론>에대해 상당히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다.

명확하게 정의해 보자면

"하나님이 제시한 복음을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놓으셨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 특성상 누가 구원받을지 미리 아시는 것 뿐,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을 미리 정하신것이 아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길과 뜻을 따르는 것, 그 결과로 구원받는것은 인간의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예정론의 비교

예정론을 세 개로 압축한 것은 신학자(학계) 의견이 세 가지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크게 이렇게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두 번째 언급한 그냥 <예정론>은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보통 칼빈주의자들이 "이중예정론"을 설명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어찌보면 문제라고 볼수도 있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독재자로 만드는 부작용이 없다.

초점하나님을 따르는데 두고 있기에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이중예정론>이다.

이 교리의 가장 큰 부작용은 구원파적인 결과다.

하나님을 따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대놓고 막산다는 것만 아닐 뿐, 구원파의 교리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중예정론> 자체는 그런 초점이 아니지만, 이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다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작은 죄를 짓더라도 "안심"하게 된다.

물론 작은 죄를 짓는다고 구원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점점 커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죄가 될 수 있고,

배교로 이어지는 결정을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는 부작용으로 일어날 수 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이중예정론자들이 절대주권의 근거를 드는 구절은 로마서 9장 10~24절이다.

특히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구절이, 절대주권자의 예정을 증거하는 구절이라는 주장이다.

( ↓ 더보기 클릭해서 본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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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9장
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내용은 바울의 창작이 아니라,  야곱과 에서 비유는 창세기 25:23, 말라기 1:1~5를 인용했고

토기장이 비유는 예레미야 10:1~10을 인용한것이다.

 

미워했다는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서 사용된 '미워하다'는 헬라어 ‘미세오(μίδεω)’ 를 의미한다.

정말로 미워하고 증오할 때 쓰기도 하지만 꼭 그런것은 아니다.

누가복음 14:26의 "부모와 처자와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에서 사용된것과 동일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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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게 정말 "미워하다","증오하다"로 보이는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증오"라고 명령한 것 같은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건 당연히 그런뜻이 아니라고 생각할거다.

맞다. 이 "미워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이다.

히브리어,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이런것을 표현할 때 ‘미세오(μίδεω)’ 증오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은

에서를 절대주권으로 미워하고 저주한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당신의 문해력은 안녕하십니까?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1학년때 국어점수 60점에서 2학년때 100점까지 올렸던 경험이 있다.

점수가 낮을땐 국어문제의 답이 도대체 왜 정답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100점까지 도달해 보니, 문제의 답이 당연하다고 인식되더라.

이게 바로 문해력이다.

문해력이 딸리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한다.

또한 아무리 똑똑해도, 선입견, 편견에 사로잡히면 문장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세계적인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바로 로마서 9장이 좋은 예시가 된다.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이야기하는것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야곱/에서의 선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야곱으로 대표되는 민족, 에서로 대표되는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목사님께 수십년간 들어온 편견을 버리고 바울의 주장을 읽어보자.

국어문제 푼다고 생각해보고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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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절대주권의 근거로 제시되는 로마서 9장 10절~24절의 앞뒤에는

바로 윗 구절들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를 마치면서도 이방인은 "믿어서 의를 얻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않고 의의 법(율법)만 쫒다가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잘좀 생각해보라.

1.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안타까워하며 로마서 9장을 시작했다. ( 1~4)

2. 야곱 / 에서로 대표되는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한다 (10~24) 

3. 다시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30~31)

정말로 로마서 9장이 야곱/에서 선택에 대한 구절로 보이는가?

 

인용된 구약구절도 민족에 대한 내용이다

또한 로마서9장에서 인용된 창세기, 말라기도 "민족"에 대한 내용이다.

개인에 대한 선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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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말라기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1: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창세기에서도 야곱과 에서를 "민족"의 대표로 인식하고 있고

말라기에서도 에서를 "에돔" 족속, 즉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용하고 있다.

 

토기장이 비유가 나오는 예레미야 10:1~10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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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18: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8: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18: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18: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18: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8: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이 구절에서는 토기장이로 대표되는 여호와의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이야기 하고 있다.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돌이키겠다.

민족이 청종하지 아니하면 부수거나 멸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민족을 "무조건적"으로 멸하기로 결정한것이 아니다.

악한민족이라서 "멸하려고" 했을지라도, 청종하고 돌이키면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생각해보자.

토기장이 비유가 과연 한 개인의 구원, 멸망에  관한 비유인가?

게다가 민족을 절대주권자 맘대로 멸하겠다는 뜻인가?

 

개인의 구원을 절대주권으로 결정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결론

1. 바울은 개인의 구원을 절대주권으로 정해놓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2. 이중예정론은 틀렸다.

   앞서 설명한 것 처럼,

구원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있었다.(예정)
나는 이 (예정)계획안에서 구원받았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던 내가
믿기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 조차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는 예정론은 너무나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잔인한 독재자로 만들고,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신으로 만드는 <이중예정론>은 잘못되었다.

3. 절대주권은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실 때 절대주권으로 판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구원, 미구원을 정해두셨다면 심판이 뭐가 필요한가?

 

참고 :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 교수님이 말한는 <유보적 칭의론> 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이분 혼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학자들도 함께 주장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참 공감이 갑니다.

간혹 <유보적 칭의론>이 바울의 주장에 위배된다고 하는의견이 있는데,

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 글에 반론이 있으신분은 언제든지 댓글로 의견주십시오.

https://jantetown.tistory.com/658

 

유보적 칭의론 - 김세윤교수, 구원 잃을 수 있다는 뜻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라고 언급되는 김세윤 교수님의 "유보적 칭의론" 이 주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드립니다. 유보적 칭의론이란? 우선 김세윤교수님의 설명을 듣겠습니다. 지금 우리

jantetow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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